개혁주의 5대 표어(sola)에 대한
해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새로운 신학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신앙운동이요 칼빈을 비롯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개혁주의신학을 회복하자는 신학운동입니다.
신학으로 말하면 개혁주의신학만큼 좋은 신학도 없습니다.
하지만 개혁주의신학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빠진 학문적 노력에 불과하다면, 사람을 살리는 신학이 되지 못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신학교가 개혁주의신학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신학을 바로 알고 실천하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와 신학교가 점점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고자 하는 열정이 한국교회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에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혁주의신학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개혁주의신학의 5대 표어(sola)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이를 실천하는 운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 정의
- ‘오직 성경’이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 66권으로 구성된 성경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경 외에도 교회와 전통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최종 권위를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오직 성경’을 주장한다고 하여, 성경 외의 피조세계와 인간의 학문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교회를 통하여 내려온 전통과 관습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것들의 참 의미를 해석해 주는 표준이며, 최후로 호소해야 할 권위입니다. 성경이 최종 계시의 집합체이며 최고의 권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경 계시도 완성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더 이상의 계시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종결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 문제점
- ‘오직 성경’은 이렇듯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성경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천명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원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정작 우리들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지 않다면 그것처럼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베스트셀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잘 읽히지 않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라는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학문적 노력으로만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라고 분명하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인 책이기에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이해해야 한다”라는 개혁자들의 주장은 다름 아닌 무릎 꿇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을 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 실천적 제안
- 성경을 읽는 신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할 것입니다. 성령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설교자가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정작 성경보다는 어떤 신학에 강조점을 두어서 가르치는 것을 지양해야 합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을 충실하게 읽어낸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착념하지 않고 신학을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백석대학교신학대학원과 백석신학교에서 성경읽기와 필사를 정식학점을 부여하는 과목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뿐이 아닌, 실제 생활 가운데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 정의
- ‘오직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중보자를 인정하기도 하였으며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인 구원관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문제점
- 우리는 배타적인 것보다는 포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오직 그리스도’라는 가르침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라는 명확한 성경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종교다원주의가 교회 밖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가득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종교다원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예수님과 초대 교회가 처해 있던 시대가 바로 종교다원주의의 강한 압력 아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실천적 제안
-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생명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현저하게 사라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매우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지식이나 윤리나 도덕을 듣기 위해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란한 수사로 가득한 설교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 강단에서 회복되기를 힘쓰는 신앙운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윤리적 실천이 없음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문제점으로 거룩과 세속의 영역을 구별하는 잘못된 이원론을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적들은 다 타당하고 그럴듯한 지적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이 모든 지적들이 문제의 진정한 핵심이라기보다는 주변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부수적인 현상일 따름인 것입니다.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명이 회복될 때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해지는 설교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먼저 설교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고 성령충만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의 교육도 달라져야 합니다. 신학자들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학자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렇게 길러진 신학생들이 복음의 최전선에 나가 생명력 있는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잘못된 신학교육의 관행을 바꾸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목회자를 길러내는 일에 힘쓰고자 합니다.
오직 믿음 (Sola Fide)
- 정의
- ‘오직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영생 곧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죄인 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오직 믿음’이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의를 성취할 수 없으며 죄 사함을 받는 것 또한 오직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선행으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으며(롬 3:10~12, 20),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는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롬 3:21~22, 28).
- 문제점
- 우리의 구원에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도 필요하다는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을 천명한 것은 너무나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 믿음이 행함을 배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행함을 추가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행함 없는 믿음”에 머물러 있음을 합리화하거나 스스로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오직 믿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한국교회의 윤리 부재 현상을 부추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실천적 제안
- 우리의 구원이 우리 편에서의 그 어떤 공로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고백함과 동시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의 삶 속에 순종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행함을 수반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 2:26)이라는 성경의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즉 생명현상은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는 우리의 언어생활 가운데 성령의 다스리심이 나타나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흔적이 나타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그 어떤 근거나 자격 요건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또한 동시에 그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어서는 안 되며 행함을 수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의 실천운동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실천운동으로서의 개혁주의생명신학을 주장하면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며 구원 받은 이후의 우리의 변화된 삶의 원리도 믿음과 성령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신념으로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갈 3:3)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천의 주된 힘과 동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운동과 성령운동에 힘써야 합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무릎의 신학이요 가슴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힘써 기도하며 이 실천운동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직 은혜 (Sola Gratia)
- 정의
- ‘오직 은혜’란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주님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고전 15:10)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에서 잊혀 있던 어거스틴의 은혜의 신학을 재발견했습니다. 그러기에 개혁자들은 공통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신칭의 교리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 문제점
- 지금 우리는 이 은혜의 복음이 심각한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자기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에 대한 거부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의 노력을 선호하고 다른 사람의 은혜에 공을 돌리기보다는 자기선전에 몰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한 경쟁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경쟁에 낙오하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하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우리가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우리의 말과 행실로 증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때 우리는 참 자유와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오직 은혜’는 그 어떤 시대보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주장입니다. 하지만 ‘오직 은혜’를 부르짖으면서도 우리가 자기부인과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자랑과 교만을 앞세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 실천적 제안
- 우리가 서로 다투는 이유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남보다 잘났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교만한 마음을 품고 서로 잘났다고 싸우지 않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오직 은혜’를 외치는 데서 끝나지 말고 반목과 질시, 분열과 다툼을 내어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서로 용서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이요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들을 우리의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생명의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물질을 포함한 모든 것, 심지어는 생명까지라도 기꺼이 나누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 정의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거울이 사물의 형체를 반사하듯이 우리가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드러내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다른 이들에게 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무언가 부족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이 바로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언가 부족하셔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 문제점
- 우리는 지금 인간을 찬양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1문의 답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영광스럽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극도로 높이는 이 시대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구호는 인생의 본분을 생각하게 하고, 인간의 자기 성취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 실천적 제안
-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의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한 때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냈던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리 주님의 경고(마 7:22~23)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행하는 일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한다는 사실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구호는 우리의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과도 연결이 됩니다. 성경적인 경건의 본질은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주로서 사랑하고, 우리의 왕이요 주님으로 두려워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만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상실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인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을 따르는 일에 자신을 헌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감옥 속에 있는 자들을 방문하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들을 위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눌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유일한 목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살리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