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어사묘"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암행어사로 유명했던 기은(耆隱) 박문수 (1691∼1756)의묘소이다.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여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오명항의 종사관으로출전하여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영조 5년(1729) 영남 절도사로 있을때 함경도지방에 수재가 있을 것을 미리예상하고 영남 제민창에 있던 조 3천석을보내어 10여 고을의 수재민을 구하였으므로후에 함흥 만세교 옆에 북민비라는 송덕비가세워졌다.
왕명을 받고 여러번 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를숙청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으며, 1741년 어영대장이 되어 국토방위에 심혈을기울였다.
영조 25년(1749) 호조판서로있을때 다른 신하들과 함께『탁지정례』를출판하여 국가경비를 절감하였으며, 죽은뒤에는 벼슬이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묘는 천안시 광덕면 은석산 정상부에 있으며, 묘의 앞에는 상석·묘비·망주석·무인석 등이있다. 묘소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이있으며, 재실 내에는 영정 2폭이 보관되어있다.
경종 3년(1723) 문과에 급제하여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오명항의 종사관으로출전하여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영조 5년(1729) 영남 절도사로 있을때 함경도지방에 수재가 있을 것을 미리예상하고 영남 제민창에 있던 조 3천석을보내어 10여 고을의 수재민을 구하였으므로후에 함흥 만세교 옆에 북민비라는 송덕비가세워졌다.
왕명을 받고 여러번 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를숙청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으며, 1741년 어영대장이 되어 국토방위에 심혈을기울였다.
영조 25년(1749) 호조판서로있을때 다른 신하들과 함께『탁지정례』를출판하여 국가경비를 절감하였으며, 죽은뒤에는 벼슬이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묘는 천안시 광덕면 은석산 정상부에 있으며, 묘의 앞에는 상석·묘비·망주석·무인석 등이있다. 묘소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재실(齋室)이있으며, 재실 내에는 영정 2폭이 보관되어있다.
이용안내
- 홈페이지
- http://www.cheonansi.net/culture/brd_tour_list.asp?no=11&part=1
- 위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1-1번지
- 주변관광지
- 천안상록리조트(5Km), 유관순열사유적지(5Km), 독립기념관(4Km)